여고생과 성추문 사건이 있었던 성낙현을 아십니까?

이 글은 이동형 작가님의 '정치과외 제1교시'에서 발췌했으며 자세하고 좋은 내용이 있으니 꼭 사서 보세요.


1969년 박정희는 3선 개헌을 시도한다. 3선 개헌이란, 대통령의 3선 연임을 허용하자는 것이 주된 개헌 내용이다. 개헌을 위해서는 지금도 그렇듯 다수의 국회의원들이 찬성해야 하는데 같은 여당의 의원들도 반대하는 이들이 다수 있어서 개헌이 쉽지 않다고 느꼈다.


그래서 박정희는 김형욱이 수장인 중앙정보부를 동원하여 정치인 공작을 하기 시작한다. 공작의 내용은 돈으로 회유하고, 남들에게 알려지면 안되는 사생활로 협박하는 방법 등이었다. 그 타깃 중 하나가 바로 성낙현이다.


영등포구치소에 수감되기 위해 나서는 성낙현씨. 1978년 8월 11일 양원방기자 사진


성낙현은 유진산의 조카와 결혼한 인연으로 1967년 제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경상남도 창녕군 선거구에 출마한다. 상대는 민주공화당(여당) 신영주 후보였는데 창녕 성씨 문중의 힘을 도움받아 승리한다. 당시 경남지역 선거구 15개 중에서 14개 선거구가 공화당의 승리였으니 신민당 성낙현의 승리는 대단했다. 마치 지금 시대에 대구에서 민주당이 승리한 것과 같다.


아무튼 성낙현은 이렇게 승리해서 국회의원이 됐지만 위에서 말했던 개헌 공작에 넘어가 박정희의 개헌에 찬성표를 던져줬다. 그 후 열받은 신민당 국회의원들은 찬성표를 던진 신민당 국회의원들의 의원직을 없애기 위해 일부러 당을 해체한 후 다시 결성하는 방법까지 사용한다. 그러나 성낙현은 공화당으로 당적을 옮겨 보궐선거에 다시 출마하여 당선됐다. 그런데 그런 파렴치한이 1978년 7월28일 돌연 국회의원직을 자진사퇴한다. 이렇게 국회의원직을 유지하고 싶어 안달인 성낙현이 자진사퇴를 하게 된 이유는 뭘까? 그것은 바로 성낙현의 여고생 성추문 스캔들이었는데 그 내용을 한번 들여다보자.


1977년 6월 여의도는 학도호군단 창단기념식 준비가 한창이었다. 이런 행사에는 학생들이 동원되는게 일반적이었고 여의도는 교통이 좋지 않아서 행사에 참여했던 학생들이 집으로 돌아갈 때 애를 먹곤했다. 그래서 많은 학생들은 지나가는 차를 얻어 타고 시내로 들어갔다.


여의도 모 여고에 다니던 여고생 세명도 이날 행사를 마치고 귀가하던 중 지나가던 차를 얻어 타게 된다. 바로 성낙현의 차다. 차를 타고 가면서 성낙현과 여학생들은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며 웃음꽃을 피웠고, 당시에 한창 유행하던 고고춤과 고고장 이야기가 나오자 성낙현이 "행사 끝나면 언제 한번 고고장에 같이 가자"고 제안했다. 이에 여고생들은 연락처를 달라고 부탁했고, 성낙현은 자신의 신분이 있기 때문에 사업가인 일본인 친구 연락처를 준다.




시간이 지나 여고생들은 성낙현이 준 번호로 연락을 했고 그때부터 성낙현과 일본인친구는 여학생들과 고고장, 술집 등에 출입하고 일본인 친구가 거주하는 아파트에서 성관계까지 가지게 된다. 그런데 이게 어떻게 알려졌을까?


이 세명의 여학생 중 한 명이 말도 없이 수업을 땡땡이치는 일이 자주 발생하자 선생님은 여고생의 가방을 검사한다. 그런데 그 가방안에서는 놀라운 물건들이 쏟아져나온다. 가발(당시 여학생들은 전부 단발이라 고고장에 갔다가는 바로 학생으로 들통나서 걸리기 때문에 고고장에 갈땐 가발을 쓴다), 사복, 피임용품이 있던 것이다. 책으로 꽉 차있어도 모자랄 판에 피임기구가 왠말이냐. 학교는 심각성을 깨닫고 그 학생과 어울렸던 학생들을 조사했다. 그러자 한 여학생의 주머니에서 10만원짜리 수표가 튀어나왔다. 지금이야 수표가 흔한 세상이지만 70년대에는 100원만있어도 여러가지를 할 수 있던 시대인데 수표라는 큰 돈이 나온것이다. 학교측에서는 깊은 조사를 했고 그 내막을 듣게되자 여학생들을 퇴학조치하게 된다.


이야기를 듣게된 여학생 학부모들은 즉시 딸들이 자주 드나들면서 성관계를 가졌다고하는 일본인 친구 아파트에 쳐들어간다. 하지만 일본인은 이미 일본으로 돌아갔다. 포기하지 않은 학부모들은 계속 추궁해 결국 성낙현이 이 사건에 연루됐다는 사실을 알아낸다.


학부모들은 성낙현에게 가서 따졌고 성낙현은 거액의 위로금을 지급하고, 학생들은 퇴학이 아닌 전학 정도로 하고, 원한다면 유학을 보내주겠다라며 딜을 시도했다. 그러나 그런 제안을 거절하고 학교에 성낙현이 연루되어 있음을 알린다. 현 국회의원까지 사건에 연루됨을 몰랐던 학교는 이 사실을 안 이상 그냥 넘겨서는 안되겠다라고 판단했다. 진정서를 관계당국에 넣었고 그 진정서가 상부에 보고됐고 정부 측에서는 성낙현에게 사퇴하라는 압박을 하게 된 것이다.


동아일보 1978년 8월 8일 기사


이후 여론이 악화되자 수사는 진행됐고 성낙현은 일본인 친구와 함께 3년형을 선고받게 된다. 그리고 여학생들에게도 위자료를 지급했다. 그러나 헬조선답게 한달도 안돼 구속집행정지로 풀려났고, 이 후에 또다시 국회의원에 당선된다.


이런 파렴치한 범죄자를 구속집행정지로 풀어준것도 웃기지만 다시 국회의원에 당선되도록 뽑아준 국민들도 참 화가납니다. 국민을 대표하는 국회의원을 뽑는다면 단순히 당만 볼게 아니라 그 사람의 행적을 보면서 뽑는다면 더 나은 대한민국이 되지 않을까 싶네요.



  • 네이버 블러그 공유하기
  • 네이버 밴드에 공유하기
  • 페이스북 공유하기
  • 라이프코리아트위터 공유하기
  • shared
  • 카카오스토리 공유하기